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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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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도 권태기가 올 수 있을까 엄마와의 대화가 재미가 없고 뭘 물어보면 짜증이 나고 그래서 막 짜증을 내다가도 후회를 하고 엄마가 하는 소리가 다 틀린 소리 같고 마치 권태기를 지나는 듯 하다. 누구와 사귀다 이러는 거라면 헤어지기라도 할텐데, 엄마한테 이별을 고할 수도 없고 서글프다. 또 막상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나가서 얘기를 하고 싶은데, 막상 나가면 대화 서두부터 짜증이 치민다. 엄마와의 관계에 있어 이제서야 처음 느끼는 감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혼란스럽다. 나는 나의 감정을 지지해야할지, 엄마를 지지해야할지 모르겠다. 꾹 참고 대화를 이어나가기에는 속에서 불이 끓는 듯해서 참을 수가 없다.
감기에 걸려보니 알겠다. 감기에 걸렸다. 토요일에 시작된 감기가 일요일에 정점을 찍고 지금은 서서히 나아지고 있다. 또 서서히 나아지나 했는데 이제는 기침이 심해져서 기침을 할 때마다 목젖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지난 일요일은 많이 힘들었다. 집 안에 있으면서 하루 종일 요양을 했는데 뭔가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따뜻한 물을 먹어야 해서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해야지'생각을 하고 몇 십분을 멍하니 앉아있거나 누워있다가 겨우 일어나서 물을 담고 끓였다. 그 정도였다. 원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못했다. 아무튼 그때야 알았다. 감기에 걸렸을 때 뭘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스위치 하나 끄고 켜는 것도 힘든데 뭘 만들고 요리를 하는 건 또 얼마나 힘든지. 그러면..
오늘 한 사람을 살렸다. 의도치않게 한 사람을 살렸다.
경솔하게 판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너를 향해 하는 말이다. 사람의 한 모습만 보고 경솔하게 판단하지 마라, 그것도 나라는 제 3자가 묘사하는, 심지어 단점을 말한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되는 직업이 아닌가. 대단히 지혜로운 어른을 바랬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다 더 미성숙하고 아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보다 더 꽉 막혔을 줄은 몰랐다. 너는 부족한 점 투성이인데 그 모든 것을 열거하며 짚어줄만큼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은 아니니, 오히려 이제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으니 그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아무튼, 나이값 좀 해라.
우리의 만남이 재미가 없다면 그건 만약 너와 나 사이의, 혹은 그보다 많은 우리의 대화가 재미가 없다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재미가 없다면 그건 누구의 탓일까? ​굳이 누구 탓인지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문제지만 굳이 따지자면 서로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이 있다. 모두 같은 비율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세 명이라면 33.3333333...%의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둘이라면 50%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 ​그런데 왜 나는 100% 내 책임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100%까지는 아니라도 왜 내 책임이 더 크다고 느낄까. 나는 이 사람을 재밌게 해줄 의무가 있는가, 없잖아. 내가 코미디언도 아닌데. 재미가 없다고 탓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만나서 뭔가 어떤 사고가 발생해서 굳이 누구의 죄인지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내 마음인데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내 마음인데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만난 사람과 보낸 시간이 재밌었는지, 어디가 재밌었는지, 어떤 게 싫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상대의 표정과 말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젯밤까지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가질 않더군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내가 지금 당장 먹고 싶은 게 모카인지 라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메리카노일 수도 있겠군요. 에스프레소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지만 그래서 뭘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인데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모르겠습니다. 왜 나는 내 마음도 모를까요.
주고 주고 주고 요즘 상담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두 차례 했는데 처음에는 좋았다가 두 번째는 별로였다가 그런다. 세 번째는 어떨지. ​상담을 받게 되면 나는 아주 큰 것을 내놓아야 한다. 남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 한다.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도 답해야 한다. 물론 싫다고 하면 강제로 말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자꾸 싫다고 거절하고 감추다 보면 상담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말하려고 한다. ​ ​나는 예전부터 감추는 게 능숙하고 익숙했던 사람이라서 상담을 할 때, 그러니까 뭘 좀 펼쳐놓고 보여줘야 할 때도 몇 개씩은 손에 쥐고 보여주질 않는다. ​타인에게 굳이 솔직할 필요야 있겠냐마는 나에게마저도 솔직하지 않아지는 것 같아서..
나를 대할 때 나를 타박하고 혼내지 말자. 남을 인정하듯 나의 다소 모자란 반응과 미숙함도 인정하자. 덧붙여 좀 존중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