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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귀여운 약점들

안녕하세요, 악필가입니다.

나는 어마어마한 악필가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명필에 가까운 글씨를 썼었다. 초등학교 때는 글씨를 예쁘게 잘 쓴다고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었다. 그 선생님께서 지금 내 글씨를 보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그렇다면 내 글씨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악필로 칭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된 걸까.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중 가장 그럴싸한 것은 많은 공부량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수업시간이 늘어나고 복습 거리도 많아지고, 또 개인 공부할 것도 많고 이래저래 자습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나는 뭐든 써가면서 이해하고 외우는 공부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눈은 머리보다 빠르고 머리는 손보다 빨랐으며 시간은 촉박했다. 눈과 머리가 느림보 손의 속도를 맞춰주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손이 눈과 머리의 속도를 따라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손은 예쁜 글씨를 포기해야 했고 악필을 그려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보니 손은 더 이상 예쁜 글씨를 자유자재로 그려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를 쓰고 글씨를 쓰면 그래도 보기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불편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잘 쓰지 않는다. 

아무래도 글씨가 제멋대로라 때로는 글씨 못 쓴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나도 내가 쓴 글씨를 못 알아볼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단점들을 뒤로하고 악필에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남들이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쁜 글씨는 글자들이 한눈에 들어와서 너무 읽기 용이하다는 단점이(대부분 이 점은 장점으로 작용하긴 한다) 있지만 내 글씨는, 즉 악필은 가끔 나마저도 속일 정도로 위장술이 뛰어나다. 그래서 노트에 나의 내밀하고 민감한 이야기를 끼적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엄청 노력해야 알아볼까 말까 한 정도다. (과장을 보태서 이야기하면) 거의 암호 수준이다. 그래서 사람이 많아 자리가 부족한 도서관에서 지금처럼 내 앞, 옆, 대각선에 사람이 있어도 나는 어떠한 이야기도 부끄러움 없이, 누가 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없이 쓸 수 있다. 하하.

이 정도면 악필도 나름 괜찮지 않습니까?